프롤로그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키, 피부, 외모는 물론이고 성격과 뇌의 성능까지도 조정 가능한 세상. 모든 변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민정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긴 팔다리, 대칭적인 얼굴, 매끈한 피부. 완벽한 외모였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그녀는 오늘 소꿉친구 태윤과 오랜만에 재회할 예정이었다. 민정에게 태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을 태윤이 알아볼 수 있을까?
1. 소꿉친구와의 재회
민정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태윤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에 들어섰다. 태윤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잔을 굴리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윤아."
민정이 이름을 부르자 태윤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얼어붙었다.
"누구세요?"
그 한마디는 민정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나야. 민정이. 너랑 어릴 때 같이 놀던."
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민정은 웃으며 태연한 척했지만, 그의 차가운 시선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변하잖아, 태윤아.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좀 더 다듬었을 뿐이야."
그러나 태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넌 민정이가 아니야."
2. 변화의 기록
민정은 휴대폰을 바라봤다. 검은 화면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처음엔 작고 단순한 변화였다. 콤플렉스를 없애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피부를 고르고, 코를 다듬고, 키를 늘렸다. 그러나 외적인 변화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성격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이 추가되었다. 뇌의 특정 부분을 조율해 더 차분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어휘 선택이 부드럽고 설득력 있도록 수정되었다. 결국 뇌의 일부를 교체하며 집중력과 감정 조절까지 조율했다.
모든 변화는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결과 민정이는 사라졌다.
3. 나는 누구인가
"태윤아, 내가 이렇게 변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여전히 민정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어."
태윤은 민정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민정은 울컥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다면 내가 민정이라는 걸 증명할게. 우리가 함께한 추억, 그 기억들을 네가 잊었는지 한번 확인해 봐."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놀이공원 기억나? 그날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네가 날 찾아줬잖아. 근데 돌아가는 길도 잃어버려서 둘이 울면서 서로 손을 잡고 있었지. 결국 경찰 아저씨가 우는 우리를 발견해서 집에 데려다줬잖아."
태윤의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민정은 이어서 말했다.
"내가 귀신 이야기로 너를 놀려댔던 것도 기억 안 나? 네가 무서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나도 겁이 났었어. 그런데 넌 늘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줬잖아. 그 덕분에 난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오히려 덜 무서웠어.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태윤은 고개를 숙였다. 민정은 그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네가 말하는 기억들, 전부 맞아.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기억나."
태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네가 어둠 속 달처럼 차오르고 기운다면, 그림자 속에서 너를 찾을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넌 내 마음이 처음으로 사랑을 배운 사람이었어."
그는 눈을 뜨고 민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이젠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네."
민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그것조차 그녀를 민정으로 증명해주지 못했다.
"넌 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야?"
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4. 테세우스의 배
민정은 커피값을 계산하고 조용히 가게 밖을 나가는 태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한참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민정은 자신에게 남겨진 기록들을 삭제했다. 민정이라는 이름도 버렸다. 그녀는 다른 도시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태윤에게 마지막 문자를 남겼다.
"너가 나를 기억 속에 간직해준다면, 민정은 여전히 존재할 거야. 네 안에서라도."
태윤은 편지를 읽고 한동안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민정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에필로그
민정은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민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태윤 역시 민정을 과거의 한 조각으로 간직하며 살아갔다.
둘은 더 이상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민정은 스스로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며, 과거의 민정을 마음속 깊이 묻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