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은호는 그 말이 틀렸다고 믿었다.
어느 날, 그는 낯선 남자로부터 기이한 제안을 받았다.
“네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어?”
남자는 오래된 주머니시계를 내밀었다. 시계의 초침은 정상적으로 움직였지만, 그 속에는 이상한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시계는 시간을 사고팔 수 있는 도구야. 네 시간을 팔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살 수도 있지.”
은호는 남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묘한 호기심에 이끌렸다.
“좋아. 그럼 네 첫 거래는 지금부터야.”
1. 첫 번째 거래
은호는 시계를 손에 넣고 자신의 시간을 실험 삼아 조금 팔아보기로 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낼 무기력한 오후의 한 시간을 팔았다.
시계가 빛을 발하며 그의 손목 위에서 시간을 ‘뺏어갔다.’ 그 순간 은호는 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한 시간이라는 기억이 그의 삶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얼마 후, 그는 팔린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되었다. 그의 한 시간은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삶에 덧붙여졌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축복이 될 수 있구나.”
은호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2. 시간의 가치
시간을 사고파는 일은 점점 은호의 일상이 되었다. 그는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을 쉽게 팔아치웠다. 반대로 절박한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살 때는 높은 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호는 곧 깨달았다. 시간이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과 연결된 무언가였다. 그는 시간을 파는 동안 점점 더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너무 많은 시간을 팔아버려 하루를 완전히 비워버렸다. 시계를 확인한 순간, 하루가 이미 거래 완료 상태였다. 그는 텅 빈 하루를 보내며 이상한 상실감에 휩싸였다.
3. 잃어버린 순간들
그날 저녁, 은호는 집에 돌아와 오래된 가족사진을 보았다. 그러나 사진 속 누군가가 흐릿하게 사라져 있었다.
“뭐지? 원래 이런 사진이 아니었는데…”
그는 사진첩을 뒤져보았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가족과의 추억이 점점 더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설마… 내가 팔아버린 시간 때문인가?”
그는 팔아버린 시간이 단지 몇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 담긴 관계와 기억까지 가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은호는 공허함과 죄책감에 시계를 꼭 쥐었다.
4. 시간을 쫓는 남자
은호는 꿈속에서 시계를 건넸던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어두운 공간에서 은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내가 팔아버린 건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어. 내 삶의 조각들까지 함께 사라지고 있어!”
남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란 그런 거야. 그것은 네가 누구인지,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담고 있지. 네가 팔아버린 건 네 삶의 일부야.”
“내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는 거야?”
“되돌릴 수는 있어. 하지만 대가가 필요하지.”
남자는 시계를 다시 내밀며 말했다.
“누군가의 시간을 빌려 네 시간을 채울 수 있어. 하지만 빌린 시간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걸 명심해.”
5. 빌린 시간
은호는 결국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의 시간을 사들였다. 빌린 시간은 그의 삶에 덧붙여졌지만, 그와 함께 낯선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어떤 날은 농장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떠올랐고, 또 어떤 날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생일 파티를 하는 기억이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이건 내 삶이 아니잖아…”
그는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빌린 시간들은 그의 공허한 기억을 채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삶이었다.
6. 남겨진 흔적
어느 날, 그는 빌린 시간 속에서 이상한 단서를 발견했다. 꿈속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시간을 빌린 사람이군. 네가 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보고 있을 거야.”
은호는 깨달았다. 빌린 시간의 주인들은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거래된 시간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연결된 흔적이었다.
“내 시간을 되찾아야 해. 너무 늦기 전에…”
7. 시간의 무게
은호는 자신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남은 모든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되찾은 시간들은 이미 변질되어 있었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은 모호하게 뒤섞여 있었고, 완전하지 않았다.
“네가 팔아버린 시간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아. 그것은 이미 다른 이들의 삶과 엮여 있어. 되찾고 싶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할 거야.”
은호는 결심했다.
“내가 그 무게를 짊어질게.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되찾는 길이라면.”
8. 되찾은 시간, 그리고…
은호는 결국 시계를 다시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난 더 이상 시간을 사고팔지 않을 거야. 내가 가진 시간의 무게를 그대로 짊어질게.”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 무게를 이해했다면, 이제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날 이후, 은호는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시간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